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Nov 03, 2024

개인적으로 세계 문학을 통틀어 러시아 문학을 가장 좋아한다.

표현하자면 인간의 생을 계속해서 곱씹게만드는 사람냄새 진득한 텍스트와 심리묘사가 소설의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유럽에 속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서유럽권으로 퍼져간 르네상스의 영향권에 들지 않아 여타 유럽 소설과는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

르네상스 영향권에 있는 유럽과는 달리 다소 늦게 근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근대화가 급진적으로 이뤄졌다.

그 흐름에서 러시아의 문학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고 보는데, 원래라면 철학같은 학문에서 다뤄야할 주제가 문학에서 이를 자주 다뤄지곤한다.

예를 들어 귀족과 농노 사이에서 생겨난 계급 문제나 인간의 존엄과 본질, 종교와 면죄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데 거리낌이 없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도 그 중 하나인데 20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지하에 틀어박힌 자의 젊은시절 수기로 시작된다.

요즘 말로하면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딱 맞을 것 같은데, 자존감이 극도로 낮은 인간(주인공)이 스스로 자기합리화하고 궤변을 늘어놓는 수기가 계속 이어진다.

1부에서는 주인공이 자기를 위안(?)하기 위한 궤변을 나열하고, 2부에서는 그 궤변이 실제로 어떻게 통하는지 묘사하는게 책의 주 흐름이다.

결국은 주인공의 모든 뒤틀림과 실패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본성을 이야기하며, 자기의 인생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자기증명을 하게 되는데…

가독성이 심하게 좋지않아 1부는 미친듯이 지루했지만, 2부 ‘진눈깨비’에서는 잘나가는 친구의 송별회와 매춘부 리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난 해프닝은 정말 흡입력 강하다.

소설의 내용은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데, 주인공에 대해 공감하긴 힘들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궤변을 따라 주인공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쉽지 않은..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심리묘사가 이 책을 최고의 블랙코미디로 만들어준다. 내용이 짧아 호기심이 있다면 추천하는 책이다.